일요일 늦은 저녁. 제안서 마감을 위한 화상회의는 계속된다. 이게 맞다, 아니다 저렇게 가야한다, 이게 나을까, 저렇게 가야죠, 수많은 토의와 언쟁과 수정에 수정… 최종, 최최종, 진짜최종 수준의 제안서 파일이 몇 번씩 오고 갔다.
고용노동부의 <청년일경험 지원사업> 홍보 제안서. 그간의 사업 과정을 분석하고,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고, 복잡다단한 단계로 제작팀과 결을 맞추며, 그걸 예쁘게 문서화하는 일. 십수 년간 해온 일이지만, 아직도 전혀 쉽지 않다. 항상 하기 싫다. 매번 두렵다.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싫지만, 끝까지 마감을 지켜서 제안서를 제출하고, 또 다른 일의 완수를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한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일자리를 지켜내는, 내 밥그릇을 악착같이 챙기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일과 일자리에 며칠이고 생각하다보니, 문득 두 단어의 온도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일’이 피하고 싶은 오늘의 숙제라면, ‘일자리’는 간절히 지켜내야 할 내일의 밥그릇이었다.
[안(Inside)] 일(一日事) – 흐르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
우리말에서 일은 세 가지다.
하나(一). 하루(日). 할 것(事).
우연일까. 아니다. 이것은 ‘일’의 본질을 관통하는 삼중주다.
일(一): 하나하나, 셀 수 있는 과업. 거창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 손끝에 닿은 ‘하나’의 매듭.
일(日): 해가 뜨고 지는 하루의 순환. 숨 쉬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
일(事): 생겨났다가 처리되면 사라지는 사건.
일이란 하나하나(一) 해치워야 하고, 매일매일(日) 반복되며, 끝나면 사라지는(事) 것이다. 셀 수 있고, 흐르고, 임시적이다.
영어의 Work도 비슷하다. 게르만 조어 *werg-는 ‘만들다’는 뜻이었다. 그리스어 ergon에서 나온 energy(내부의 작용)처럼, 일은 본래 내 안의 힘을 바깥으로 쏟아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일은 만들기보다는 소모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일’ 앞에는 흔히 ‘산더미 같은’, ‘지겨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밖(Outside)] 일자리(座) – 머물고, 고정되고, 쌓이는 것
반면 ‘일자리’는 단 하나의 한자로 읽힌다. 자리(座).
자리는 내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할 구체적인 지점, 좌표를 의미한다. 일자리를 갖는 것은 내가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하는지와 연결된다. 소속감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나를 그곳에 묶어두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중국에서 일자리를 뜻하는 강웨이(岗位)는 원래 초소(Sentry post)를 뜻한다. 내가 반드시 지켜내야 하고, 그곳을 벗어나면 안 되는 엄중한 위치. 일본의 쇼쿠(職)도 소명과 장소성을 강조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의 역할과 그 자리를 유지하는 도리.
영어가 Job(경제적 단위)과 Work(활동)를 다소 건조하게 구분한다면, 동양의 ‘일자리’는 훨씬 더 뜨겁고 처절하다. 일은 하기 싫어서 미루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일자리는 결코 미룰 수 없는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가 무슨 ‘일(事)’을 하는 지보다 어느 ‘자리(座)’에 앉아 있는 지를 묻는다. 흐르는 물(일)을 그릇(자리)에 담아 축적하고, 사회에 보여주도록 강요한다.
우리가 느끼는 괴리감은 본래 흐르고 흩어져야 할 ‘일’의 생명력과 고정을 요구하는 ‘자리’의 논리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오늘도 밥을 짓는다
이번에 준비한 청년일경험지원사업의 가장 큰 목적은 청년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다. 요즘 회사는 실무 경험이 있는 중고신입이나 경력직을 선호하는데, 정작 신입이 경험할 기회는 없다. (애초에 경험이 없으니까 신입이라 부르지만..)
사회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내 자리 찾기란 눈물겹게 어려운 일이다. 나도 겪었고, 지금도 매일 같이 부딪히는 현실이다. 무섭고 하기 싫은 일을, 끝끝내 부여잡아 일자리를 고수하는 세상 힘든 일.
여든을 바라보는 우리 어머니는 평생 해온 채소 가게를 아직도 하신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내가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취직을 하겠니. 남들 보기에 이 가게가 뭐 대단할까 하겠지만, 나는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서 엄마는 너무 좋다.”
일자리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다. 당당함을 지킬 수 있는 곳, 내가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할 수 있는 증표.
또 새 제안서 작성을 시작한다. 일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자리는 비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하루(日)는 여전히 흐른다. 우리는 매일 하나하나(一)의 새로운 일(事)을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그릇이 없어도, 우리는 계속 밥을 짓는다.
언젠가 그 밥을 담을 그릇이, 온전히 채워지길 기대하며.
[덧붙이며] 청년일경험 지원사업 제안서를 마치며
이번 고용노동부 청년일경험 지원사업 홍보 제안서를 준비하며 느꼈던 실무적인 고민을 이 글에 녹여냈습니다. 수년 째 고용 한파가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정부가 청년들에게 ‘일 경험’이라는 일회용 접시라도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사업입니다. 물론, 일회용 접시로는 맛있는 밥과 새로운 반찬을 담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접시라도 먼저 만들어서 내밀어주는 기회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일어설 용기가 되기도 합니다. 당장 ‘자리(座)’가 주는 안정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오늘 내가 완수한 ‘일(一·日·事)’의 성취가 내일의 단단한 밥그릇을 빚는 밑거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안서의 문장을 채웠습니다.
우리 이거 들어가려다 말았는데. 말길 잘했네요. 실력자와 붙을 뻔. 수주를 기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