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공적이다 – 사회복지 권리

#장면 1 : 뒤통수를 치는 한 마디

“사회복지는 시혜와 봉사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올해부터 방송통신대 사회복지학과 학생이 되었다. 개강을 하고 지난 주에 첫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님이 저 말씀을 하셨다. 앗, 사회복지가 권리라고? 국가에서 도와주는 체제나 학문 아냐? 사회 안전망이니까 시혜 아닌가?

보건복지부의 수많은 정책 홍보를 맡아서 진행해왔지만, 사실 그것이 국민의 권리 행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시각 자체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국가 정책이 국민 권리의 발현이었다니, 어째서 그런 큰 그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가.

#장면 2 : 피식 웃음 나던 ‘소셜 타임’

“오늘은 수업 끝나고 ‘소셜 타임’을 가져봅니다.”

지난 학기까지 대학원을 다니면서 심심찮게 들어본 단어가 ‘소셜’이다. 뜻을 따져보면, 주거니 받거니 술 한잔 하면서 친목을 다진다는 의미다. ‘그냥 술자리, 혹은 뒷풀이 합시다’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소셜’이라는 말을 쓸까, 대학원식 ‘있어빌리티’의 표현인가, 나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피식 웃었다.

여기서의 소셜은 현대인이면 누구나 사용하는 SNS의 ‘Social’와 위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사적인 관계맺기를 뜻한다.

#장면 3: ‘사회’라는 벽과 ‘소셜’이라는 접착제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사회’를 뜻하는 ‘Society’의 어원은 라틴어 Socius로, 그 뜻은 놀랍게도(!) ‘동료’ 혹은 ‘친구’다. 대학원에서 뒷풀이 대신 ‘소셜 타임 갖자’고 할 때의 그 말은 단순히 멋져보이기 위한 콩글리시가 아닌, 단어의 제 뜻을 충실히 따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개인끼리의 가벼운 친밀함이 ‘사회’라는 거대한 개념의 원형이라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밖(Outside)] 사회의 겉모습

우리에게 ‘사회’는 거대하고 딱딱하다. 국가, 시스템, 혹은 ‘사회생활’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처럼 나를 규제하고 가르치는 벽, 울타리에 가깝다.

[안(Inside)] Social의 속 뜻

반면 ‘소셜’은 세포 같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술잔을 기울이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접착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신 ‘권리’의 실체를 발견했다. 만약 사회복지가 국가가 베푸는 시혜라면, 우리는 국가라는 거대한 벽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수혜’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즉,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위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사회복지의 본질이 ‘Social(동료들의)’ Welfare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socius — 함께하는 사람’의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우리는 서로의 ‘Socius(동료)’이기에, 네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진다”는 연대 의식에서 출발한 사회적 계약이 사회복지의 핵심이다.

대학원에서 ‘소셜 타임’을 가지며 서로의 네트워크가 되어주듯, 사회 전체가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주기로 약속한 것, 그것이 바로 사회(Social) 복지의 진짜 얼굴이었다. 내가 낸 세금과 기여가 누군가의 생존을 지탱하고, 언젠가 내가 흔들릴 때 사회가 나를 붙잡아줄 것이라는 믿음. 이 상호 간의 약속이 있기에 복지는 당당한 지분이자, 권리가 된다.

결국 사회복지란, 사적인 술자리에서나 쓰이던 그 말랑말랑한 ‘소셜’의 에너지를 공적인 ‘권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인류의 가장 지혜로운 발명품인 것이다.

# [말의 안팎]을 가로지르며

그동안 정책 메시지를 쓰면서 나는 ‘말의 겉’만 핥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책을 ‘혜택’으로 포장하는 데 급급했지, 그것이 시민의 당연한 권리임을 알지 못했다.

이제 나는 ‘소셜’이라는 단어를 비웃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와 술잔을 기울이는 개인 간 소셜의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나의 권리 문제로 인식하는 공공의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늦깎이 사회복지학도로서 내가 배울 것은 결국 하나다. 가장 사적인 ‘동료애’를 가장 공적인 ‘권리’로 번역해 내는 법. 그것이 내가 앞으로 써 내려갈 ‘사회복지’라는 말의 진짜 안쪽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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